LEE MANNA
LEE CHAEYOUNG
Where I Was
5 August - 26 August 2023
<나를 비춰 보는 공간>
황현승 | Director, Critic
고공 갤러리는 이만나•이채영 2인전 <내가 있던 자리>를 2023년 8월 5일부터 26일까지 개최한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일상의 장소들에 집중해 온 두 작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들의 그림은 유사한 기조를 지니고 있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람자들을 매혹시킨다.
이만나의 작업은 유화 물감을 재료로 구현된다. 화면은 작은 색점들이 글레이징Glazing 기법으로 중첩되며 채워지는데, 집적되어 층리를 형성한 무수한 색 입자들은 진동을 만들고, 진동은 공명하며 퍼져 나간다. 이만나의 그림이 발산하는 파동은 관람자들의 마음까지 뚫고 들어가 반향을 일으키고, 이만나가 특정 장소에서 경험했던 감정과 그 장소의 기묘한 공기까지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이채영의 작업은 먹을 재료로 구현된다. 묵수墨水는 거듭 종이 내부로 스미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이채영이 반복하여 얹는 안료는 도드라지지 않고 계속 종이 이면으로 침잠한다. 담묵이 표면 너머로 쌓이며 창출해 내는 밀도감은 투명한 깊이를 형성하며 화면 위에 심연을 열고, 그림 앞에 선 관람자들을 이미지 안으로 조용히 끌어당긴다.
이만나의 그림은 종이나 소리굽쇠의 울림과 같아서, 묵직하게 번지며 보는 이의 마음에 떨림을 남기는 반면, 이채영의 그림은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호수와 같아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리저리 움직이던 마음이 차분히 잦아든다. 이만나•이채영의 그림은 각기 특유한 오라Aura를 발산하며 일종의 사유 공간을 관람자들 앞에 마련하는데, 관람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그 사유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 그림이 전달하는 정서에 감응하거나 쉼에 다다르게 된다.
이만나•이채영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대상을 묘사하지만, 정작 사실적으로 구현된 이미지들은 현실의 장소가 아닌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들이 머물렀던 ‘자리’와 그 자리에서 느꼈던 ‘비현실적 감각’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부조리Absurde’ 개념에 비춰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나•이채영이 경험한 장소들을 명확히 ‘헤테로토피아’로 일컫기는 어려운데, 그 장소들은 사회 제도에 의해 디자인되어 사회적 기능을 갖는 장소들이 아니며, 유토피아적 성격이나 모반의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는다. 또한 두 작가가 느낀 ‘비현실적 감각’을 카뮈의 ‘부조리’ 개념에 기대어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데, 그 생경한 감각은 현실감에 균열을 가져오긴 하지만, 부정적인 소외감을 일으키거나 존재적 허무를 주지시키며 환멸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만나•이채영의 작품 세계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의 철학을 더 끌어오자면,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근원어Grund-worte ‘너Du’ 개념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작가들이 느낀 ‘비현실적 감각’을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두 작가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비종교적 체험이며, 인간 심리에 귀속된다. 총체적 인간 감정이 내재되어 있는 이만나•이채영의 작품 세계를 몇몇 철학 개념으로 정리하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시도이다.
‘모든 세계 규정은 우리가 규정된 것에 이미 접근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있다는 이 유일한 사실로부터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을 추상적 기록에 불과하다.’ -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
비약하는 해석과 과도한 분석을 뒤로하고 좀더 단순히 말하자면, 우선 이만나•이채영이 그린 장소들은 언젠가 그들이 물리적으로 머물렀던 자리이다. 더불어 두 작가는 어떤 심정을 지닌 채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런 점에서 그림 속 장소들은 그들 고유의 심리적 자리이기도 하다. 탁월한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이만나•이채영은 내밀하고 사적인 감각을 보편적으로 표현한다. 덕분에 두 작가의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도 어느 공터나 인적 없는 길모퉁이에서 느꼈을 법한 저마다의 ‘비현실적 감각’을 떠올리게 된다. 낯선 장소가 돌연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수렴하며, 지나온 날들을 소환하고 또한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기분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만나•이채영의 그림은 관람자들에게 그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와 한때의 마음을 돌아보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관람자들은 현재 서 있는 자리를 가늠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만나•이채영이 지난날의 자리에서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